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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뉴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하고 있는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라는 이 신성한 세계정책을 실현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 강뉴 부대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훈시 중에서.​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자, 6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문 제 83호를 채택하고, "무력공격의 격퇴와 그 지역에서의 국제평화 및 안전의 회복을 위해 한국에 대해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합니다. 이는 유엔이 창설된 지 5년만에, 첫번째 집단 안보 체제의 발동이었습니다. 유엔의 발빠른 대응은 미국이 앞장 선 것도 한 이유이지만, 과거 국제 분쟁에 대해국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19세기 유럽 외교식 중재에만 매달리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국제 연맹의 무력함에 대한 반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해 총 16개국이 참가하여 다국적군이 편성됩니다. 이들이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한국을 위해 병력을 파견했고 이역 만리에서 적지 않은 피를 흘린이유는 정치 안보적인 이유도 있고, 미국과의 관계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케이스가 바로 이디오피아입니다.​이디오피아는 터키처럼 직접적으로 소련의 위협을 받는 국가도 아니고,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함이나 반공 이데올로기때문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만 따지는 국제 사회의 현실에서, 정말 순수한 뜻에서 참전한 국가가 바로 이디오피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낱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기아국가"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으며 제국주의 시절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유일한 나라였습니다.(태국처럼 열강들의 타협의 결과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력으로 지켜낸)또한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해도 유엔 창설 회원국이자 국제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1950년대와 60년대 번영을 누렸던 이 나라는1974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멩기스투가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군부 독재를 실시하면서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이디오피아의 참전을 주도한 사람은 하일레 셀라시에황제였습니다. 그는 냉엄한 국제 사회의 현실에서 강대국들의 호언장담이나 평화라는 말이 얼마나 허울 뿐인지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이디오피아의 계몽군주이자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처음으로 실시한 그는 1934년 12월 이른바 "왈왈 사건(The Walwal incident)"으로 이탈리아의 침략에 노출되자 국제연맹의 회원국으로서 국제연맹에 대표단을 보내어 이탈리아의 침략이 부당함을 호소하고 국제 연맹의 규정으로 지원해 줄 것을요청합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그는 즉위와 함께 헌법을 선언하여 이디오피아를 입헌군주국으로 바꾸었고, 낙후된 이디오피아의 봉건체제를 고수하는 반동세력과 내전을 벌이며 서구화하는데 앞장섰으며 노예제 폐지, 의무 교육, 서구식의 의료 체제 도입, 사회 인프라 확충 등 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1968년 5월 강원도 춘천에서 이디오피아군 참전 기념비가 건립되었을 때에는 한국을 친선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가뭄으로 인한 기근과 경제 불황이 닥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소령과 소위 "더그(Derg)"라고 불리는 군부내 파벌들이 소련의 원조를 받아 1974년 9월 반란을 일으키면서 강제로 폐위당한 뒤 1년 후 처형됩니다.​하지만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채, 이디오피아는 전차와 항공기, 독가스를 앞세운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창과 방패로 맞서며 무려 8개월을 저항했지만 아무런 외부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황제는 나라를 잃은 채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1936년 6월 30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총회에서 그는 남의 일인양 끝까지 방관했던 열강들을 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회의에 참석했던 수많은 외교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이지만, 내일은 당신들 차례일 것이다!(It is us today. It will be you tomorrow)"​그로부터 5년 뒤인 1941년4월 6일, 영국군과 이디오피아 연합군은 이탈리아군을 격파하고 아디스 아바바를 탈환합니다. 이탈리아가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는데는 8개월이 걸렸지만 도로 빼앗기는데는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황제 역시 5월 5일 수도로 환향할 수 있었고 이 날은 "이디오피아 해방일"로 정해집니다. ​이렇게 강대국들의 침략 전쟁을 몸소 체험했던 그는 한국전쟁 역시 단순한 민족 동란이 아니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벌인 일이라고 규정하고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을 결정하고 파병 부대의 편성을 지시합니다. 당시 이디오피아군은 총 4개 정규 사단 5만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황제 직속의 제1근위 사단(1st Division Imperial Bodyguard)에서 자원자들을 모아 1개 대대를 편성합니다. ​황실 근위대에서도 가장 뛰어난 병사들이 선발되어 철저한 훈련을 거친 후 1951년 4월 12일 아디스 아바바 메스켈 광장에 집결하여 황제로부터 직접 부대기를 하사받습니다. ​황제는 이 자리에서 "강뉴 대대(Kagnew Battalion)"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강뉴(Kagnew, 암하라어 : ቃኘው)란,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적을 초전에 격파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며1896년 아도와 전투 당시 메네릭크 2세 황제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라스 마코넨(Ras Makonnen)이 타는전투말에게 처음으로 강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 강뉴부대를 사열 중인 황제​​이들은 지부티항을 출발해 머나먼 극동으로 향했고 1951년 5월 7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제7사단 휘하에 편입됩니다. 1956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5차례에 걸쳐 연 인원 6,037명이 파견되어 전사자 121명, 부상자 536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디오피아군은 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무기의 사용에는 익숙치 않았지만 오히려 백병전에 능숙했으며 방심하다가 적의 기습을 당하면 쉽게 패닉에 빠져 무너져 내렸던미군이나 한국군과 달리, 아무리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포위되어도 침착하게 적을 격퇴하여 이디오피아군 정예부대의 명성을 떨칩니다.이들을 지휘했던 미 제7사단장 아더 트루도는 이들에 대해 유엔군에서 가장 용맹한 부대라며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한국 전선에서 여러분과 제7사단의 협동 근무는 유엔군의 조화와 협동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공산군과의 숱한 전투에서 역경을 극복하고 귀 부대가 모두 승리로 이끈 것은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이승만 대통령 역시 1953년 7월 27일 강뉴 부대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면서 "강뉴 부대는 막중한 정찰업무를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하였고 모든 장병이 참 군인정신을 보여 주었습니다."라는 말로 이들을 치하하였습니다. ​​​▲ 한국에서의 강뉴 부대. 이들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포로가 되지 않겠다며, 단 한명의 포로도 없었습니다. 군대의 용맹함은 우수한 무기가 아니라 싸우고자 하는 의지에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그 의지란 일본군처럼 억지로 강요된 의지가 아닌,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를 분명히 알 때 나오는 것입니다.​뿌리깊은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에 빠져상전으로 군림하는데 익숙했던 미군이나 영국군과는 달리, 이디오피아군은 건국 이래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기에 내가 곧 조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자신들의 이미지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적과 싸우다 차라리 전사할 지언정 포로가 되지 않겠다며 악귀처럼 싸워 총 238번의 전투에서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한편, 민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고아들을 위해 자신들의 월급을 모아 서울 동두천에 보화 고아원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입니다.​​오늘의 책 출판사에서 나온《강뉴》는 이디오피아 전사들의 한국전쟁 참전기를 다룬 책입니다. 저자인 키몬 스코르딜스(KIMON SKORDILES)는 그리스 기자로 한국전쟁을 종군하며 이디오피아군을 비롯해 유엔군을 취재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에 "에티오피아군의 세계 평화에 대한 공헌을 증언하기 위해 엄숙한 사명감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국내에는 56년도 더 지난지난 2010년에야 비로소 번역 출간되었습니다.이 책은 이디오피아의 역사와 이탈리아군과 벌인 투쟁, 셀라시에 황제가 왜 강대국의 침략에 대항해 국제사회가 평화 유지를 위한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을 주장했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 배경과 강뉴 부대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습니다.​저자가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이다보니 그리스인 특유의 감성적인 면이 강하고이디오피아군의 용맹함을 한편의 대서사시처럼 묘사합니다. 오디세이아의 20세기 판같은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풍부한 사진과 이디오피아군의 주요 작전에 대한 설명은 흥미로운 읽을 거리입니다. ​이들이 도착한 시기는 이미 한국전쟁이 휴전선 주변에 교착상태가 된 이후이기에 대규모 작전에 투입되는 대신, 주로 정찰과 소부대 방어전에서 큰 활약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전투가 김화 전투 지구의 요충지 요케 진지를 놓고 벌인 공방전입니다. ​"500여명의중공군은 57명이 지키는 요케 진지를 인해전술로 덮쳤다. 이들은 마침내 맨 앞 참호를 돌파했다. 하지만 이디오피아 전사들의 격렬한 반격에 적은 뒤로 밀렸다. 침호 안팎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중공군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요케 진지를 손에 넣을 심산이었지만 이디오피아 전사들은 그날 밤 다시 한번 백병전 불패의 기록을 갱신했다. 다음 날 정찰대는 중공군 90명의 시신을 확인했다." - p.165​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흔히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가장 큰 피해자이자 당사자였던 우리조차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으로 생각하기보다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놓고 "요즘 학생들은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생각한다"라며 안보 의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한국전쟁에 얼마나 알고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솔직히 299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한국전쟁에 파병한 나라가 몇 나라인지조차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사람이 몇이나될까요. 731부대를 독립군 부대라고 말하는 서울대 교수가 버젓이 국무총리를 하는 판에 국민들보고 뻔뻔하게도 국가관이 부족하다느니, 안보 의식이 없다느니 하는 모습을 보면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시중에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많이 있지만, 대부분 한국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전쟁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데만 치중할 뿐입니다. 무려 16개국이 파병했지만 이들이 어떤 이유로 파병했으며 어떻게 싸웠는지를 다룬 책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웠을 때 이디오피아는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우리 나라에도 가난한 이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남의 나라를 도울 여지가 어디에 있느냐" 따위의 이기적이고 오만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국제 원조에도 인색합니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닌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이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것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려었던 시절 남들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또한 그동안 그 사실을 얼마나 기억하고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있는지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은멩기스투의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미국의 용병"으로 매도당한 채 모든 재산과 지위를 박탈당한 채 비참하게 살아야 했고 지금도다를 바 없습니다.​한국전쟁은 미국만이 아니라 실상 우리 역시 "잊혀진 과거"일 뿐이지만(매년 6월 한달만 빼고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디오피아군의 참전기를 다룬 책으로서 꼭 일독을 권합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용사들의 참전기!
25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강뉴부대의 눈부신 활약과 고귀한 희생

강뉴 는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의 종군기자인 키몬 스코르딜스가 전장에서 직접 목격한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용사들의 눈부신 맹활약과 고귀한 희생을 알리기 위해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펴낸 것을 한국전쟁 60년을 기념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 에티오피아 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송인엽 소장이 에티오피아 현지에서 발굴해 번역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은 즉각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파병했다. 그 가운데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전사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에서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승리한 맹활약과 희생으로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켜냈다.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공산 침략군으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지상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고, ‘격파’라는 의미의 부대명 ‘강뉴’를 친히 내렸다.

1951년 4월 강뉴부대 1진을 시작으로 5진까지 한국전쟁에서 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극동의 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뉴부대 용사들은 열심히 싸웠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다. 종군기자의 눈에 비친 그들의 맹활약과 희생을 상세히 기록한 이 책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가 잊고 산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하일레 세라시에 1세
‘강뉴(Kagnew)’의 의미
추천사 - 한국보훈처장 김양
강뉴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 기르마 월데기오르기스 에티오피아 대통령
추천사 - 국회의원 정동영
서시
트루도 소장의 소개문
한국어판에 부치는 서문
2판에 부치는 서문
서문

제1부 서장
제1장 대의를 위한 십자군
제2장 에티오피아
제3장 에리트레아
제4장 비극의 희생양
제5장 불굴의 정신
제6장 다시 한번 집단안보의 정신으로

제2부 강뉴
무루게타 불리(Mulugetta Bulli) 장군
멩기스투 네웨이(Mengistu Neway) 장군
제7장 한국으로

강뉴부대 제1진
중령 테쇼메 이르게투(Teshome Irgetu)
제8장 영광에의 길
제9장 적군의 예기 꺾기
제10장 영감에 대한 감사

강뉴부대 제2진
중령 아스파으 안다르게(Asfaw Andargue)
제11장 새로운 영광을 위하여
제12장 포위된 정찰대
제13장 정찰대의 활약
제14장 철의 삼각지에서의 세계적인 백병전
제15장 항복은 없다.

강뉴부대 제3진
중령 월데 요하니스 쉬타(Wolde Yohannis Shitta)
제16장 대의의 제단에
제17장 새로운 월계관을 위하여
제18장 한국에 온 무루게타 불리 장군
제19장 오늘의 에티오피아의 영광

강뉴부대 제4진
중령 아스파으 합테마리암(Asfaw Haptemariam)
제20장 자유세계의 방벽

강뉴부대 제5진
대위 요하네스 메스켈(Yohhanes Meskel)
제21장 평화 지킴이
제22장 에티오피아군 연락사무소

제3부 종장
제23장 영원한 세계 평화를 위하여

부록
1. 표창장 및 훈장, 축하문
2. 셀라시에 황제 강뉴부대 출정사
3. 루스벨트 여사 연설(유엔군 대표 초청)
4. 셀라시에 황제 건배사(각국 유엔 대표)와 연설(유엔총회)
5. 파사카 하일레마리암(Fasika Hailemaraim) 소위의 그때와 오늘
6. 하일레기오르기스 메케넨(HaileGiorgis Mekonnen) 중위의 한국전쟁 당시, 귀국 후 전성기 그리고 오늘
7.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한국전 참전 용사탑(IPU 대표단 참배)
8. 강뉴부대 전사자 명단
9.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용사회 임원진 명단
10. 한국전쟁 참전 에티오피아 용사회 회장과 부회장의 그때와 오늘
11. 추천의 글
12. 헌시
13. 저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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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많이 가라않았을때 동기부여가 필요할때 일부러자기계발서적만 골라서 읽는 편이다. 자극적인 제목에 책을 골랐지만 자기계발서를 수준낮은책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는 작가의 의견도 실려있다. 맞다. 주변에서 간혹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는 사람을 종종본다.하지만 난 심리학이라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취향이다. 각자 개개인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받아들여지는게 다를수 있다. 그래서 100프로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해볼만한것들과 취할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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