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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영성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표류하는 느낌이다. 4.16 세월호 참사일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랬고, 책을 읽고 난 지금 역시 그러하다. 다만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감당하지 못할 무게의 슬픈 중압감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파란 뱃머리가, 아니 파란 배한쪽 바닥이 남아있기까지 지켜보았던 그리고 한동안은 기적을 미치도록 기대했던 그러나 그것이.. 파란 뱃머리를 무력하게 지켜보며 희망고문을 당했다는 사실 앞에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백성은 무지하게 TV 뒤에 갇혀 그날 그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에 민감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똑바로 보려고 안감힘을 쓰곤 한다. 그러나 내가 TV 앞에 아니 TV라는 작은 공간 밖에는 보지 못했음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시각이었다. 숫자로 표현하기 정말 죄송하지만 삼백명이 넘는 그것도 살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 앞에서 배를 돌렸다는 이야기를 뒤로 한채 희망 고문을 했다니. 사람들의 일상이 그랬다. 글쎄. 그게 비단 한 어린 학생들이라서 더 그랬을까? 즐겁게 수학 여행을 앞두고 떠났을 발걸음 이라서 그랬을까? 배안의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눈물 흘렸고, 멍했고, 삶을 손에 잡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말했고, 잊지 않겠다고 말했고, 살아 돌아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마치 내 가족인양 내가 살아내야하는 일상을 죄스러워 하기도 했다. 모두가 한 목소리, 한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맞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우울증 이 번져가고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세월호 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은 오히려 세월호라는 사건이 일어났던 4.16 사건의 그날보다 더 잔인하지 않았던가. 여기 같은 같은 목소리를 내는 14인의 저자가 모여 사회적 영성 이라는 이름으로 그날의 사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나와 같은 관점을 갖는 이들을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에매우 반가움과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세월호 의 사건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누구 하나 책임지고 그 책임을 떠안지 않는 싯점에서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나 자란 나는 성경의 욥 을 떠올려 본다. 사람들의 시각은 전체를 볼 수 없는 매우 제한된 존재이다. 그런 그들이 친구 욥 을 보자하니 처음엔 같이 눈물 흘릴 정도로 안타까운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욥의 푸념을 듣자하니 이것참 고약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장 욥기 37장까지 욥을 향하여 질타와 훈계가 이어 진다. 기독교 인구가 많아지면서 어디를 가나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신비체험을 했다는 사람들도 많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보편화되어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종종 묻고 싶다. 하나님은 그리 멀리 계시지 않다는 성경의 말씀도 있지만 같은 일화를 보고 제각각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알고 보면 다른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마다 편을 들어주는 것이냐? 묻고 싶다. 내가 보는 것이 맞고, 내가 주장하는 것이 맞다는 차원을 떠나 타인의 일에 대하여 성급하게 말하고 있는 우리들의 그 눈물 이라는 것이 피상적인 감상인지 아니면 참혹한 죽음을 맞은 이들을, 그리고아직도 그 싯점에 삶이 멈춰버린 유족들을생각하는 눈물이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나는 두어 달이 지난 무렵에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아! 삶은 외로운 것이라더니 세월호 이후로도 그 죽음조차 해명되지 못한 억울한 사건과 죽음들, 유족들을 보면서 결국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옆에서 울어주었지만 결국 모두 떠나고 유족들만 덩그러니 남아 그 슬픔을 그 아픔을 감내하는 것이구나. 온 몸으로, 온 삶으로. 그렇다면, 삶은 어쩌면 외로운 것이 아니라 다음 번에 누가 그런 일을 당할지 알수 없는 두려운 것이 아닐지?
‘사회적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세월호 이후에도 믿음은, 사회는, 공동체의 ‘삶’은 가능한가?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합리적 판단의 영역뿐만 아니라 세밀한 일상의 영역까지 자본의 속삭임에 온몸으로 반응하고 있다. 끝을 모르는 자본주의적 욕망은 세계를 파괴하고, 이웃을 파괴하며,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무서운 질서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른다. 저 거대한 ‘자본의 욕망’에 대해 성찰하는 능력은 크게 모자라고, 우리는 그 앞에서 분노와 냉소, 불신과 우울로 상처입고 있다. ‘감정노동’이라는 말처럼 감정은 자본의 관리 대상이 되었으며, 감정의 파행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에 대한 처방은 기껏 소통 혹은 힐링이라는 수사에 맴돈다.

14인의 비평가와 신학자들이 지은 사회적 영성 은 우리 사회 감성의 흐름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책이다. 이성의 영역에서 성찰을 이해 혹은 의사소통이라고 한다면, 마음 ? 감성의 영역에서 성찰을 공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이 공감 행위에 관한 신학적 ? 인문학적 성찰이 바로 ‘사회적 영성’이다. 이미 우리 주위에는 치유와 배려, 희생과 배품을 말하는 ‘윤리적’ 언설들이 가득하다. 지은이들은 그 안에서 영성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망각해온 공동체적 ? 관계적 영성을 찾아내고 그 효과를 새로이 읽어내고자 한다. ‘영성’의 이름을 아직 부여받지 못한, 하지만 더 심층적이고 넓은 영적인 사건들, 가령 세월호 사건이나 밀양 송전탑 사건 등에서 ‘사회적 영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증언하며 기억하자고 말한다.


서론: 사회적 영성 시론 -김진호
고통, 말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엄기호
힐링 담론과 사회적 영성 -백소영
망루의 상상력, 사회적 영성 -김응교
세월호 국면에서 나타난 사회적 영성 -황진미
혼, 숲 -글-사진 자우녕
애도, 기억, 저항: 세월호 ‘안의’ 민중신학 -정경일
도덕이 사라지는 그곳으로 영성은 가야 한다: ‘사회적 영성’을 말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하여 -정용택
사회적 영성의 정의와 방법론 -박정은
무덤에서 사라지다, 그리고 함께 돌아오다 -조민아
격노 사회와 ‘사회적 영성’ -김진호
목사의 영성에서 장로의 영성으로: 영성 권력의 이동 -최형묵
뉘우치라, 더 뉘우치라는 망령을 거부하며: 윤리적 자본주의의 시대, 사회적 영성이란 -김신식
사회적 영성과 주체의 정치학: 민주적 유물론의 패러다임을 넘어 -이택광
영성을 듣는 시간 -신윤동욱